쉽게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읽기와 쓰기를 가능케 해주는 문자 기록을 거부했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글로 기록하면 배운 것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다고, 글을 읽고 나면 마치 그것을 전부 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읽은 것을 깊이 생각하거나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고.
소크라테스의 복음을 기록한 ‘파이드로스’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글을 읽어 아는 자는 진정으로 지혜로운 자가 아니라 겉보기에 지혜로운 자일뿐이오(파이드로스, 275장 b절).” “문자는 그것을 쓰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에 무관심하게 해서 그들의 영혼 속에 망각을 낳을 것이니, 그들은 글쓰기에 대한 믿음 탓에 바깥에서 오는 낯선 흔적에만 의존할 뿐, 안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힘을 빌려 상기하지 않게 될 것이오(파이드로스, 275장 a절).”
우리는 책을 읽고 나면 그것을 안다고 믿지만 사실은 읽은 것을 전부 소화하지 못하며 깊은 사고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와 같이 대화를 중요시하는 ‘구술 문화 시대’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대화와 토론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습득한 지식을 내면화하기 위해 암기하고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거나 질문을 하는 과정에서 깊은 고찰을 유도했다.
무엇보다 소크라테스는 질문을 던지는 행위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독서는 내용을 내면화하고 암기하며 질문을 하는 행위 자체가 얼마든지 생략될 수 있다. 그런 관점은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책이란 외형에 불과하다. 본질은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이다. 책은 시대 변화에 따라 점토판이거나 죽간이거나 파피루스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전자책이 되었다. 우리는 책의 외형을 꾸준히 바꿔 왔지만 정작 책의 내용을 습득하는 행위는 인간 의지에 맡겨 둘 수밖에 없었다.
소크라테스의 문자 비판은 독서가 가진 치명적인 약점을 지적했다고 할 수 있다. 단,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소크라테스는 구술 문화 시대의 사람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소크라테스 시대와 그 이후 시대를 ‘구술 문화 시대’와 ‘문자 문화 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감수성은 그 시대 정서에 매몰되기에 십상이다.
다음 세대는 그 이전 세대와 다른 정서로, 또 다른 감수성으로 진화해 나간다. 소크라테스는 문자를 비판했기에 그 어떤 저서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크리톤’, ‘파이돈’, ‘향연’, ‘파이드로스’와 같은 책들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다. 매우 이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 책들은 누가 쓴 것일까?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이었다. 그는 스승 몰래 스승의 말씀을 기록하였는데, 요즘 말로 하자면 ‘컨닝페이퍼’였던 셈이다. 좀 더 좋은 의도로 말하자면, 그는 스승과 달리 문자 문명을 받아들였다. 그 덕분에 그와 같은 유산을 여러 권의 책으로 후세에 남겨줄 수 있었다. 만약 플라톤이 스승의 말씀을 몰래 기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기억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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