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더 커진다.
ㅡ 카를 마르크스
행복과 최대치의 만족은 모든 욕망의 무제한적인 충족에서 나오는것이 내며, 그것이 복지상태(well-being) 로 이어지지도 않는다.
우리는 쾌락이 과연 인간의 실존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이 될수 있는가 라는 의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서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최대의 사회적 실험을 벌이고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소수특권층뿐 아니라 적어도 산업국가에 사는 인구 절반이 그들이 추구하는 쾌락을 실제적으로 충족할 수 있게 된것이다.
나는 나를 위한 모든것을 가지고 싶다. 공유가 아닌 점유만이 내게 즐거움을 준다. 소유가 나의 목표일진대 많이 소유하면 할수록 그만큼 나의 존재가 커지기 때문에 나는 점점 더 탐욕스러워질수 밖에 없다. 나는 모든 타인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 나의 고객들에 대해서 속임수를 쓰고 나의 경쟁자들을 파멸시키고자 하며 내가 고용한 고용자들을 착취하고 싶어한다. 나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나는 결코 만족할수 없다. 나는 나보다 더 많이 소유한 시기하지 않을수 없고, 나보다 더 적게 소유한 사람들을 두려워 하지 않을수 없다.
소유의 추구는 계급간의 끝없는 전쟁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계급을 타파함으로써 계급투쟁에 종식을 고하겠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주장은 엄연히 허구이다.
존재하는것과 소유하는것의 차이가 동양적사고와 서양적 사고의 차이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을 중심으로 여기는 사회와 사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의 차이라고 할수 있다.
소유지향은 돈, 명예, 권력에의 탐욕이 삶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어 버린 서구 산업사회 인간들의 특성이다.
소비자들의 태도에는 온 세계를 삼키려는 욕망이 깔려있다.
소비자는 우유병을 달라고 보채는 영원한 젖먹이이다.
알코올 중독이나 마약중독 같은 병리적 현상에서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굳이 이 두가지 현상을 들추어서 평가절하하는 이유는 그것이 중독 해당자로 하여금 사회적 의무를 이행할수 없게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인듯하다. 끊지 못하는 끽연은 위의 경우처럼 모멸의 눈초리를 받지는 않는다. 그것 역시 일종의 중독이기는 하되 끽연자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킬뿐, 그의 사회적 기능능력을 해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생동감은 항상 아름다운 얼굴을 만드는 법이니까 , 아직은 어느 쪽도 상대방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말하자면 양측 모두 존재적 측면에 다시 말하면 상대방에게 무엇이든 베풀고,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데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결혼과 더불어서 상황은 근본적으로 변한다. 결혼의 약속은 쌍방에게 상대방의 육체, 감정, 관심을 독점할 권리를 부여한다. 이제부터는 그 어느 편도 상대방의 마음을 사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이제 사랑은 소유하고 있는 무엇, 하나의 재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두사람 사이에는 사랑을 일깨우려는 노력도,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려는 노력도 수그러든다. 그들은 권태로워지고 각자 지녔던 아름다움도 소멸된다.
다른 상대라면 자신의 열망을 채워주리라는 망상에 자신을 맡긴다.
한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보다는 파트너의 숫자를 늘려서 끊임없는 새로운 자극으로 권태를 물리침으로써 사랑의 난점을 기피하려는 사람들이다.
아침에는 ‘빵’을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줄것을 약속한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두가지의 중요한 계율을 붙인다.
‘저마다 먹을만큼씩 거두어들여라’ 는것이 첫번째 계율이다.
신이 내린 두번째 계율은 안락함과 탐욕, 소유지향에 대한 경고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내일을 위해서 남겨두지 말라는 계율을 받는다.
그런데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한지라’ (출애굽기 16:20)
안식일이란 인간을 무거운 일의 짐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해방시켜준다는 세속적 의미에서 휴식일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안식일은 기쁨의 날이다. 이날은 인간이 완전히 자기자신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날은 근심과 슬픔은 물론 소유와 돈도 금기시되는 날이며 시간이 극복되고 오로지 존재가 지배하는 날이다.
그런가 하면 현대의 안식일은 즐기는날, 소비의날, 자기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날이 되어버렸다.
새차를 구입하거나 무언가를 자기것으로 만드는 행위 , 들가의 꽃을 꺽는, 혹은 처녀를 자기것으로 하는 행위와 같은 종류로서 무엇인가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
그런 체험은 잦읅수록 의기양양한 느낌을 더하게 한다
익숙해진 자극은 금세 싫증나고 무료해지므로 새로운 자극을 향하는 현대인의 욕구이다.
그들은 얼마간 성관계를 가지는 시기를 거친다음 다음 짝을 바꾸려는 욕구를 느끼지 않으면 부부로 결합하며, 그러고도 사랑이 식으면 서슴없이 헤어진다.
소유를 지향하지 않는 이 사회에서 성행위의 기쁨은 바로 존재의 표현이지, 성적 소유욕의 결과가 아닌것이다.
소유냐 소유하지 않는것이냐 라는 문제는 도덕적-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금욕적 생활과 비금욕적 생활 가운데의 양자택일을 의미하고 여기서 비금욕적인 생활은 생산적 기쁨이며 또한 무한한 쾌락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어떤 행동에 역점을 두지 않고 그 행동의 저변에 깔린 입장에 초점을 맞추어보면, 이와같은 양자택일도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포기와 단념에 몰입하는 금욕행위는 어쩌면 소유와 소비에 대한 강렬한 욕구와 동전의 양면일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금욕주의자는 표면상 그런 욕구들을 몰아냈을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소유와 소비를 억제하려는 바로 그 노력을 통해서 끊임없이 소유와 소비에 몰두하고 있다는 역설이 성립된다. 예를 들어 광신적 채식주의자들은 그런식으로 자신의 파괴적 충동을 몰아내며, 광신적 인공임신중절 반대자들은 그런식으로 자신들의 살인욕구를 몰아낸다.
무릇 모든 광신적 태도는 다른 충동, 흔히 그것과는 정반대의 충동을 감추려는 태도라는 의심을 낳는다.
많은 연구들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나태한’ 이유가 학습자료가 너무 무미건조하고 생동감 없는 방식으로 제공되어서 피학습자들이 진정한 흥미를 느낄수 없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지루함과 억압이 제거되고 학습자료가 흥미를 돋우는 방법응로 제공되자마자, 똑같은 그룹이라도 놀랄만한 능동성과 자발성을 펼친다는 것이다.
주로 젊은이들 가운데에는 자신이 태어난 부유한 환경을 둘러싼 사치와 이기심을 참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자식들은 ‘원하는 바를 모두 가지고 있다’ 고 여기는 부모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이 젊은이들은 고립된 삶, 생명 없는삶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킨다. 왜나하면 실제에 있어서 그들은 ‘원하는 바를 모두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들이 가지지 못한것을 동경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사랑과 빈곤의 종교[기독교]에 귀이했던 로마제국의 부유층 자제들과 왕자로 태어난 석가모니는 원하기만 하면 온갖 사치와 쾌락을 한몸에 누릴수 있었지만, 소유와 소비가 불행과 번뇌의 씨앗임을 깨달았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상류층 자제였던 나로드니키, 이 젊은이들은 그들이 태어난 신분계급의 불의와 무위도식하는 생활을 견딜수 없어서 가족을 떠났고, 가난한 소작인들과 한패가 되어어울려 살면서 그렇게 러시아 혁명투쟁의 기반을 닦았다.
이 비슷한 현상을 우리는 오늘날 미국과 서독의 부유층 자제들에게서도 볼수 있다. 그들은 사치스러운 풍족한 생활을 권태롭고 무의미 하게 여긴다. 전우원
남자는 결국 단 몇분 동안만 남자로 존재하며 대부분의 시간은 어린아이
기쁨이란 몰아의 경지, 순간의 불꽃이 아니라 존재에 내재하는 불씨이다.
반대로 쾌락은 말초적 흥분을 절정을 넘어서면 비애의 감정을 남긴다. 흥분은 맛보았지만 그릇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산업사회에서는 만사가 시간의 지엄한 명령에 굴복한다.
오늘날의 생산방식은 작업과정 하나하나가 특정 시간에 맞출것을 요구한다. 비단 컨베이어 벨트에 매달린 작업뿐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 활동은 전적으로 시계에 맞추어 조정되어 있다. 시간은 그냥 시간이 아니라 바로 돈이다. 기계는 최대한으로 활용되어야 하며, 노동자들에게는 따라서 기계에 맞춘 리듬이 강요된다.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필수조건은 원자의 무장해제이다.
우리 경제의 병적 측면중 하나는 거대한 군수산업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인 미국이 오늘날가지도 군비를 감당하느라고 보건, 복지, 교육을 위한 예산을 삭감해야 하는 실정이다.
지금껏 인류의 역사에서 공허한 쾌락을 누리는 삶은 소수 엘리트만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권좌에 있으면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했으므로 완전히 분별을 잃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경제적 및 정치적 권력도 가지고 있지 않고 책임도 떠맡지 않은 모든 중산층이 이와같은 무의미한 소비생활에 자신을 떠맡기고 있다.
서구세계의 대다수 사람들은 소비자로서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며 그와 같은 행운을 누리면서도 그것만으로는 미흡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수효가 점점 더 늘고 있다. 그들은 많이 소유하는것이 곧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것이다.
다만, 서구셰게의 극빈계층이나 ‘사회주의’ 국가의 대다수 주민들의 경우에만 이 낡은 환상이 그대로 살이있다. 사실상 ‘소비를 통한 행복’ 에 대한 희망은 이 부르주아적 꿈을 미처 실현시키지 못한 나라들에서만 강하게 살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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